길 위에서 만난 세렌디피티 기타 July, 2020 현지에 뿌리내린 건축물은 반드시 떠나야만 만날 수 있고 그래서 더 특별하다. 백종환이 부려놓는 건축 여행 그 첫 번째 주인공은 르 코르뷔지에의 숨결을 담은 모더니즘 집합 주택의 시작, 유니테 다비타시옹이다.

시선과 시각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장 빠르게 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물리적으로 가장 빠른 방법으로는 당연히 비행기나 KTX가 먼저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물리적’이란 단서를 걷어낸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이를테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는 것”. 사랑하는 이와 동행하면 아주 천천히 이동하는 자동차 안이더라도 시간이 상대적으로 아주 빠르게 흐른다. 지난해 다녀온 남프랑스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비록 출장길이었지만 좋은 공간에서 머무를 생각에 긴 비행시간을 가볍게 보낼 수 있었고 머무는 내내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남프랑스에 도착하기 전 잠깐 머문 파리에서는 ‘어린왕자 스토어(Le Petit Prince Store)’에 들르기도 했다. 지극히 개인적이기는 하지만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덕후인 나로서는 꼭 들러야만 했던 성지 중 하나였다. 어른이 되어 다시 펼친 <어린 왕자>는 내게 최고의 연애소설로 다가왔고, 책을 읽다 문득문득 나타나는 아포리즘은 디자이너로서 방향성을 잡아나가는 데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특히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의 모습에서 모자를 발견한 일화는 ‘크리에이티브’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진정한 창의란 전혀 새로운 것의 창조가 아니라 기존에 존재하는 것을 연결해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라는 평소의 생각과 맞닿아 있었던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사랑을 본 사람은 없지만 우리는 그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마치 바람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고 그것을 믿는 것과 같은 이치다. 무릇 디자이너란 이러한 마음의 시력이 밝아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그리고 누구에게나 보이는 것들을 자신만의 눈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믿는다. 잇고 연결하고 되새김해 재발견하는 것.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빚어낼 수 있었서다.


1 색색의 성냥갑처럼 입체적인 구조감이 느껴지는 유니테 다비타시옹의 입면. 최초의 모더니즘 주택 사례로 꼽히는 건축물은 비바람과 망치질에 깎인 콘크리트를 사용함으로써 원시적인 미감을 창조해냈다.
2 르 코르뷔지에의 모듈러 이론이 새겨진 벽의 한쪽.



르 코르뷔지에와 유니테 다비타시옹
그런 면에서 보면 르 코르뷔지에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탐닉하고 마침내 그 너머까지 ‘설계’한 거장이라 일컬을 만하다. 마르세유 공항에서 30분 정도 이동했을까. 그림으로만 보던 유니테 다비타시옹(Unit? d'Habitation)이 멀리서부터 보이기 시작하자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기 어려웠다. 이 건물은 르 코르뷔지에가 만든 세계 최초의 아파트(공동 주택)로 1947년부터 1952년까지 6년 동안 지어졌다. 지금은 주민이 일부를 주거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할애하고 나머지는 호텔로 개방해 이방인이 직접 머물 수 있도록 제공하고 있다.
외부에서 바라보는 유니테 다비타시옹의 첫인상은 거친 듯 아름다웠다. 육중한 매스를 거대한 기둥으로 띄워 만들어낸 필로티는 오랜 시간을 버텨온 거친 콘크리트의 표면 질감과 맞물려 웅장하면서도 아스라한 느낌을 전해주었다. 건물은 무려 23개의 평면 타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복층 구조의 공간도 포함되어 있는데 337채의 아파트가 지상에서 7m 높이에 떠 있는 셈이다. 필로티 구조는 아마도 건물 바로 앞에 펼쳐진 지중해의 기후적 특성을 고려한 결과이리라. 본격적으로 내부를 살펴보기에 앞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게 바로 외부 콘크리트에 새겨진 르 코르뷔지에의 ‘모듈러 이론’이다. 르 코르뷔지에는 ‘모듈러(Modulor)’라는 단어의 창시자로 건축 형태는 물론 모든 디자인에 이를 응용했다. 그는 “훌륭한 비례는 편안함을 주고 나쁜 비례는 불편함을 준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주택의 대량 생산이라는 사회적 당면 과제를 혁신적으로, 그러면서도 아름답게 풀어냈다. 근대 건축 기술을 함축해 수직으로 높게 지은 집합 건물은 그렇게 궁극의 비례미와 생활의 편의를 놓치지 않았다. 실제로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는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는 건축가는 지금 당장 연필을 놓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 규모만이 아니다. 빨강, 파랑, 노랑의 컬러와 함께 입면에 펼쳐지는 다채로움은 마치 오르골의 음계판을 연상케 하며 ‘사람’을 향한 그의 고민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이 건물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공간이 바로 옥상 정원이다. 얕은 수영장과 조깅 트랙, 유치원 등 이곳에는 당시 주민이 사용했던 공용 시설이 절묘한 배치와 조형성으로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단순히 기능에만 치우치지 않고 사람과 자연이 자연스레 융합하는 모습은 건축가로서 그의 고민이 읽히는 대목이다. 한낮, 뜨거운 태양 아래 어린아이들이 수영장에 발을 담그고 노는 모습을 목격했는데 나 역시도 소심한 마음에 다음 날 새벽 홀로 옥상에 올라 아무도 없는 그곳에 발을 담근 기억이 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외부에서 이어지는 감동은 속살에서도 계속된다. 호텔 방에 도착하자 그가 디자인한 LC4 체어가 가장 먼저 맞이하고 그 너머로 지중해 바다가 펼쳐졌다. 전체적인 크기와 작은 주방 그리고 화장실의 위치, 가구의 손잡이 하나하나까지 곱씹어볼수록 휴머니티를 근간으로 한 그 시절 디자이너의 생각을 느낄 수 있었다.
흔히 요즘을 경험의 시대라고 한다. 공간도 다르지 않다. 르 코르뷔지에의 고민이 만들어낸 것은 어쩌면 하나의 건축이 아니라 도시와 인간 그리고 ‘삶’에 관한 가치이자 50년이 훌쩍 지난 오늘날 우리가 경험해야 할 현재 진행형의 유산일지도 모르겠다. 여행을 하다 보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세렌디티피(serendipity) 같은 일이 종종 일어난다. 때로는 사람이 때로는 상황이 그렇다. 물론 어떤 공간이나 길 위에서 만난 건물 자체가 될 수도 있겠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기분 좋은 운명을 고스란히 받아들인 채 잊지 못할 하나의 경험으로 오랫동안 간직하는 일뿐이다.


1 주변 풍경과 자연스럽게 조응하는 옥상 정원.
2 르 코르뷔지에가 디자인한 LC4 체어가 놓인 객실 내부.


공간 디자이너 백종환
2005년 국민대학교 공간 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2013년 동 대학원을 수료했다. 2005년부터 10년 동안 어소시에이트에서 근무했고 2015년 WGNB를 설립했다. WGNB는 “같은 것을 보고 다른 생각을 하다”를 모토로 브랜드와 사람을 담는 좋은 공기가 머무는 공간을 지향한다. WGNB가 만든 주요 공간으로는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현빈 집을 비롯해 교보문고, 엔드피스, 덱스터 스튜디오, 카카오 프렌즈 스토어, 써밋 갤러리, 준지 플래그십 스토어 등이 있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인정받아 JCD 디자인어워드,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에서 수상한 바 있다. 2018년에는 FRAME 어워드를 비롯해 IF 디자인 어워드에서 최고상인 골드를 받았으며, 독일 디자인위원회가 주최하는 아이코닉 어워드에서 ‘2018 올해의 스튜디오’상을 수상했다.

Editor홍지은

Photographer백종환(WGNB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