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하는 아홉 개의 섬처럼 전체공간 October, 2020 그 흔한 벽도 없고 명확히 분리된 층도 없지만 그렇기에 기대하지 않았던 새로운 일상을 마주하게 된다. 이를테면 집 전체로 퍼지는 빗소리나 저 높은 창 위에 떠오르는 보름달 같은 것.

정석에서 탈피한 집
서울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던 설윤형, 정슬기 씨 부부는 남편 정슬기씨의 제안에 따라 부산에 특별한 집에 짓기에 이르렀다. 새로운 보금자리를 구상하며 두 사람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아이들에게 획일화되지 않은 공간을 경험하게 해주는 일이었다. 마침내 이들 가족이 정착하기로 한 곳은 번화가에서 벗어난 광안리 근처의 한적한 동네 민락동. 건축 총괄을 맡은 정영한 아키텍츠의 정영한 소장과 부부의 인연도 무척 흥미롭다. 남편 정슬기 씨가 대학생 때 자주 가던 카페의 주인이 정영한 소장의 아내였는데 그때의 만남을 계기로 건축가와 건축주로서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정슬기 씨는 당시 카페에서 기르던 강아지 ‘루키’의 새끼 ‘아드’를 데려와 민락동의 새집에서 기르고 있다.
남다른 인연 때문일까. 정영한 소장은 건축주의 온전한 존중 속에서 기획부터 설계까지 자율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벽체와 바닥으로 공간을 구분 짓는 전통적인 주거 공간에서 탈피하려는 실험적인 과정에 대한 건축주의 깊은 이해도가 뒷받침되었을 터. ‘정, 은설’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집은 ‘우물 정(井)’ 자의 모양처럼 9개의 방이 저마다의 다른 높이로 떠 있는 듯한 구조다. 이 독특한 집을 구현하기 위해 정영한 소장은 국내에서는 주택 시공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철골 구조를 선택했다. 흔히 ‘철골’, ‘스틸’ 하면 떠오르는 차가운 느낌이 나지 않는 이유는 창의 설계에서 비롯한다. 사생활 보호를 위해 외벽에는 창호가 많지 않지만 위층으로 갈수록 그 수를 늘리고 천장에 과감하게 창을 2개나 냈다. 집 안 어느 공간에서나 날씨와 하늘의 색과 같은 외부 요소 그리고 환경적인 변화를 보다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한 건축가의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내부를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은빛 건물의 문을 열면 펼쳐지는 새로운 세상. 현관을 들어서면 주방과 다이닝 공간 그리고 거실을 별다른 분리 요소 없이 하나로 이은 LDK 구조를 마주하게 된다. 왼쪽 계단은 아이들의 놀이 공간으로 이어지며 우측의 원형 계단은 부부의 생활 공간으로 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다이닝 공간에는 화이트 컬러의 세븐 체어를, 위층의 원형 테이블에는 레드, 옐로, 그린, 그레이 색상의 세븐 체어를 매치해 공간마다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면서도 통일감을 주었다.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집과 옆 건물 사이에 나무를 심었다. 널찍한 창가를 가득 메우는 대나무가 색다른 운치를 더한다.


남편 정슬기 씨는 거실 중앙의 올리브 나무 옆에 놓인 빈백에 기대 쉬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천장에 투명 창을 내 이곳에서 올려다보면 하늘이 한눈에 들어온다.



머무는 이가 머무는 곳을 정의할 수 있도록
가족은 새 보금자리에 부부와 자녀 2명의 이름을 한 자씩 넣은 ‘정, 은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정, 은설’은 명확한 층수에 따라 공간을 분리했다기보다 방과 방이 연결되어 있는 구조다. 현관문을 열면 거실과 주방, 다이닝 공간이 나타나고 그 위로는 아이들의 공간, 거기서 올라가면 공용 욕조와 테라스 그리고 부부의 생활 공간이 펼쳐진다. 그러나 공간의 용도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
“건축주의 최소한의 라이프스타일과 요구 사항만 반영했어요. 라이프스타일은 변화무쌍하니까. 기존의 것을 고수하기보다는 변화에 따라 사용자가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집인 셈이죠.” 정영한 소장은 사용자가 능동적으로 공간을 정의하고 본인의 생활 방식에 맞추어 바꾸어나가는 공간을 의도했다. 그의 취지대로 설윤형 씨는 두 자녀가 성장한 후에는 지금과는 다른 모습을 구상하고 있다. 지금은 아이들에게 유대감을 심어주고자 놀이 공간과 침실을 함께 사용할 수 있도록 했지만 두 자녀가 독립된 공간을 원하는 시기가 오면 방을 나누고 유리 벽을 덧대거나 다른 소재를 활용해 벽이나 문을 세워줄 생각이라고.
처음부터 이 가족이 새로운 집에 익숙했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계단이 많고 동선이 복잡해서 가장 효율적인 경로를 체득하기까지 2주가량의 시간이 걸렸단다. 또 밤에는 스크린도어를 내려 빛은 차단할 수 있지만 방음이 되지 않아 아이들이 잠드는 시간 이후에는 집안일을 하지 못하고 TV 켜기에도 조심스러워졌다. 지금은 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효율적인 생활을 위한 최적의 경로를 찾아냈다는 설윤형 씨는 다른 무엇보다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모습 때문에 이 집에 만족도가 몹시 크다고 말한다.


두 자녀가 함께 공부할 수 있는 공부방. 그 옆에는 원형 테이블과 세븐 체어를 컬러별로 두었다.


천장의 창을 통해 하늘을 바라보며 목욕을 즐길 수 있는 욕실


모든 공간이 벽체 없이 서로 통하는 개방적인 구조라 어느 곳에서든 아이들의 동선을 파악할 수 있다.



‘정, 은설’에서의 값진 일상
집의 가장 위쪽, 중정을 마주한 곳에 욕조가 자리하고 있다. 물놀이를 즐길 수 있어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다. 천장에는 아예 개폐가 가능한 창을 내 날씨가 좋은 날에는 열어두고 비가 오면 색다른 분위기 속에서 목욕을 즐길 수 있다. 이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 어디냐는 질문에 설윤형 씨는 광안대교와 구도심을 아우르는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테라스를 꼽았다. 야경을 바라보며 맥주를 즐기기도 하고 친구들을 초대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고. 아이들도 이곳에서 비눗방울 놀이를 하거나 돗자리를 펴고 일광욕을 하며 퍼즐 놀이를 즐기기도 한다. 이들 가족은 테라스에서 사용하려고 버너를 따로 구입했을 정도로 공간을 알차게 활용하고 있다.
“이 집의 진가를 느낀 건 코로나19가 시작된 후였어요. 초여름즈음 저는 재택근무를 하고 있어서 아이들과 함께 집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졌는데 전혀 답답하지 않았죠. 집 안 곳곳에 아이들이 할 일이 넘쳐났어요.”
집의 모든 공간이 서로 이어져 있고 전체적으로 뚫려 있는 구조이다 보니 답답함을 느끼는 순간이 거의 없었단다. 대신 아이들과 1층의 취미실에서 길 잃은 새끼 고양이를 보살피고 달팽이에게 먹이를 주는 등의 소소한 일상에 적응해나갔다고.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다가 아이가 위쪽 창을 보며 “엄마, 달 떴어!”라고 말하던 순간을 회상하며 설윤형 씨는 이 집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더 가까이에서 자연을 느끼고 가족이 밀접하게 소통할 수 있는 집. 아이들에게 색다른 경험을 선사하고 시야를 넓혀줄 수 있는 ‘정, 은설’에서 네 가족이 꾸려나갈 이야기는 무한하다.
건축 및 설계 정영한 아키텍츠(02-762-9621)


침실로 향하는 복도 끝에는 건식 세면대를 마련했다.


집 안이 전체적으로 화이트 톤이라 시간의 흐름에 따른 빛의 색감이 잘 스며든다. 저녁 노을이 질 무렵에는 붉은빛이 스며들어 색다른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위층에 자리한 부부의 침실. 침대와 TV만을 들인 휴식 공간으로 전동 커튼을 활용해 빛을 차단할 수 있다. 창문 너머로 테라스와 동네 풍경이 한눈에 내다보인다.


외부에서는 다소 폐쇄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실내에 들어서면 개방적인 반전 분위기에 전혀 답답하지 않다. ‘정, 은설’은 1년 4개월의 공사 기간을 거쳐 2019년 11월에 완공되었다.



현관 옆 차고 문을 열면 남편 정슬기 씨가 골프를 즐길 수 있는 취미실과 주차장, 반려견 ‘아드’가 머무르는 공간이 있다.















Editor오하림

Photographer이종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