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묵화를 닮은 집 전체공간 September, 2020 짙고 밝은 색채로 다소 원시적인 추상화를 구현했던 호안 미로의 세계를 고스란히 옮겨 담은 듯, 햇빛이 종일 머무는 가브리엘의 공간은 지중해를 연상시키는 세라믹 오브제와 오래된 가구 그리고 햇살에 일렁이는 자연을 담은 식물들로 에너지가 넘친다. 질감이 그대로 노출된 흰 회벽과 짙은 고동색으로 단정하게 통일한 공간은 마치 승려가 머물다 간 자리처럼 정갈하고 은은하다.

회칠로 마무리한 벽과 단차를 활용한 의자 및 가구는 공간을 나누고 연결하는 주요 요소가 된다. 아프리카 스타일의 테이블은 나가(Naga), 나무 스툴은 빈티지, 펜던트는 1960년대 생산된 북유럽 라탄 소재 빈티지, 세라믹 화병은 1950년대 프랑스 빈티지, 카펫은 라 코발타, 벽에 걸린 그림은 작자 미상.


자연을 담은 이 테라스는 가브리엘이 특히 정성을 들인 공간으로 하얀 돌을 깎아 만든 듯한 긴 벤치와 날이 좋으면 활짝 열 수 있는 창이 매력적이다. 왼쪽의 나무 조각은 파리 생투앙 벼룩시장에서 구입한 것.



소요와 고요
바르셀로나 시내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해안가 공장 지대 포블레노우(Poblenou) 지역은 1926년에 건축된 아르데코 양식 건물인 카사 안토니아 세라와 재개발된 신재생 건축물들이 공존하고 있는 곳이다. 뉴트로 물결을 타고 이미 많은 빌딩들이 들어섰음에도 개발과 증축이 끊이지 않는 바로 이곳에 코발토 스튜디오(Cobalto Studio)의 수장 가브리엘 에스카메(Gabriel Escamez)의 보금자리가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변화의 중심에 있는 주변 환경과 1970년대부터 섬유 창고로 쓰이던 독창적인 공간에 마음을 빼앗겨 이곳을 매입한 그는 건물의 무게를 지탱하는 내력벽을 중심으로 좌우 벽을 허물고 널찍한 오픈 스페이스를 만들었다.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빈 캔버스라는 점이 좋았어요. 이곳은 저의 집이며 동시에 코발토 스튜디오의 중심 철학이 집합된 공간이어야 하기에 설계와 소재 연구에만 9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럼에도 공사와 스타일링까지 3개월 만에 끝낼 수 있었는데, 남다른 안목으로 고른 가구나 무심한 듯 놓인 오브제의 각도를 보니 그가 머릿속으로 여러 번 그려낸 크로키 덕분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해볼 수 있다. 세밀한 설계를 거쳐 탄생한 공간은 눈길이 머무는 공간마다 조화롭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어디에서 보아도 입체적인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타고난 열정에 상상력까지 넘치는 가브리엘·스페인 영화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 호안 미로, 카탈루냐의 문화와 전통을 사랑하는 그는 지중해 전통 축제와 공예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그에 관한 프로젝트를 해보는 것이 꿈. 벽에 걸린 그림은 스페인 아티스트 미겔 앙헬 캄파노(Miguel ?ngel Campano)의 작품.


글로시한 초록색 타일과 잎 넓은 식물들이 풍성한 느낌을 더하는 다이닝 공간. 나무 테이블은 1940년대 프랑스 빈티지, 의자는 올라비 헨니넨(Olavi H?nninen), 초록색 타일은 바르셀로나 크리스털 세라믹으로 비스발(Bisbal).


집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주방. 금속 테이블은 1960년대 빈티지, 유리병은 카탈루냐 지방 공예품, 그림은 1970년대 아티스트 귀도(Guido)의 작품, 세라믹은 1970년대 빈티지.



공간과 재료
새하얀 회벽과 거의 조각에 가까울 정도의 가구들, 열대 식물로 꾸민 그의 아파트는 과거 공장으로 쓰던 곳을 집으로 리모델링하면서 흥미로운 공간 분할을 시도한 결과물이다. “지중해 해안가의 집을 살펴보면 돌계단, 아치형의 복도, 투박하게 돌로 만든 사각 테이블 등 이미 회벽 마감만으로 그 형태를 갖추는 경우를 볼 수 있어요.” 가브리엘은 이에 영감을 받아 160m²의 넓은 스튜디오형 공간에 병풍이나 가구를 적절히 배치해 ‘테라스를 즐길 수 있는 거실’, ‘욕실이 딸린 침실’. ‘집 안쪽 아늑한 주방’ 공간으로 나누었다. 전체적으로는 약간의 프라이버시가 필요한 화장실을 제외하면 그의 집은 그저 하나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 정도로 공간 분할에 신경 쓴 흔적이 엿보인다. 또한 재료는 스페인 바르셀로나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소재만을 선별해 사용했다고 귀띔한다. 마이크로시멘트로 고르게 마감한 바닥, 오후의 볕이 따스하게 스미는 회벽, 오래된 가구, 머스터드색 가죽, 초록색 타일이 조화로운 그의 아파트는 치열한 고민과 연구 끝에 탄생한 것으로 그 자체로 커다란 미장센과 다름없다.


벽에 걸린 그림은 작가 페테르 마테스(Peter Mathews)의 작품, 세라믹 볼은 가브리엘의 작품. 테이블 위에 놓인 화병은 모두 카탈루냐 전통 공예품. 램프는 제르바소니(Gervasoni), 긴 나무 테이블과 팔걸이 의자는 조르디 빌라노바(Jordi Vilanova), 의자는 올라비 헨니넨(Olavi H?nninen).



지중해의 푸르름을 담은 코발트
클로에, 돌체앤가바나 등 우리에게도 익숙한 굴지의 브랜드의 아트 디렉션 및 세트 디자인을 담당하던 가브리엘은 2016년 서른 살이 되던 해 자신의 이름을 내건 코발토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코발토’라는 이름은 지중해 건축과 미적 세계관을 담은 것으로 호안 미로나 이브 클라인의 ‘블루’에 비견해볼 수 있을 정도로 그에게 의미가 깊다. 뤽 베송 영화 <그랑 블루(Le Grand Bleu)>에서 잠수부 자크 마욜이 ‘깊이를 알 수 없어도 몸을 던져보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바다’로 묘사한 지중해는 가브리엘에게도 마찬가지로 한없이 넓고 깊은 미지의 존재. “그리스 산토리니섬에서는 오랜 시간 자연이 만들어낸 원시적인 아치형 공간과 코발트색 문을 볼 수 있어요. 코발토 스튜디오는 1940년대 합리주의적 사조의 영향을 받아 미니멀하고 실용적인 실내 건축을 추구하지만 프로젝트마다 늘 약간의 광기를 담아내려고 노력하죠. 언제나 두드려보고 싶은 그 푸른색 문처럼 말이에요.” 이 말을 건네는 그의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하다. 넘치는 에너지와 천부적인 상상력으로 최근에는 인테리어 디자인을 넘어 전통 공예품을 이용한 실내 장식에 관심을 갖고 현지 세라미스트와 협업해 작품을 직접 프로모션하는 등 전방위로 활동하고 있다. “세상에서 제가 가장 사랑하는 일이 바로 가구와 오브제를 구입하는 거예요. 지금 이 집에 살기 시작하면서 금욕의 신 디오게네스처럼 소박하고 검소하려고 마음먹지만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매순간 느끼죠(웃음).” 가브리엘에게 코발트블루란 어쩌면 지중해권 문화의 따뜻한 전통을 지켜내면서 소박하고 진정한 건축으로 소통하고 싶은 그의 바람을 담아낸 일종의 선언문일지도.


머스터드색 리넨 시트까지 모두 그의 큰 그림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조화로운 인테리어의 침실. 벽에 걸린 그림은 스페인 아티스트 미겔 앙헬 캄파노(Miguel ?ngel Campano)의 작품, 브라스 램프와 작은 카펫은 라 코발타, 의자는 1930년대 카탈루냐 지방 빈티지.


독특한 디자인과 세련된 타일, 빈티지 세면대가 눈에 띄는 침실. 세면대는 1950년대 생산된 빈티지, 수전은 도른브락트(Dornbracht), 거울은 빈티지.


해가 늘 쏟아지는 곳, 욕실 역시 열린 공간으로 욕조는 17세기 이탈리아 빈티지.


Editor김소현

Photographer김민은(파리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