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연한 계절 잇기 기타 June, 2019 비스듬한 햇빛이 공간 깊숙이 스민다. 열린 창 너머 바람이 너울댄다. 환한 계절을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사붓사붓, 가만가만. 조금 늦게 걸어도 나무라는 이 없는 고택에서의 한나절.

남으로 창을 내겠소
허약한 마음이 달리 어쩔 도리가 없을 때 무시로 창을 연다. 먼 데 시선을 던지고 흐르는 공기를 느끼고 수런거리는 마음이 고요해질 때까지 머물러본다. 언젠가 시인 오규원은 말했다. “벽을 만든 게 인간이지만 창을 자주 여는 것도 인간이다. (…) 창을 열고 마음이 창 밖으로 나가면 몸도 불쑥 따라 나간다. 몸의 뿌리가 마음에 있기 때문”이라고. 집집마다 달린 창은 그래서 영혼의 출입구라 덧붙였던가. 사직공원이 내려다뵈는 소담한 언덕배기에서 열리고 있는 <차경(借境), 운경고택을 즐기다> 전시는 잊고 있던 출입구를 다시금 반추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400여 년 세월 속 기품 있게 나이 든 한옥에 머물다 보면 주변 풍경을 소유하지 않고 잠시 ‘빌리는’ 선조의 넉넉한 시선을 마주하게 된다. 여기에 모노콜렉션을 이끌고 있는 텍스타일 디자이너 장응복과 가구 디자이너 하지훈의 작품까지 부려놓으니 더할 나위 없다. 그저 남으로 한 뼘 창을 내는 마음으로 순간순간을 기꺼이 누리면 될 일이다.



운경고택 안채로 달큼한 바람이 넘나든다. 여러 개의 조각 천으로 장식한 잇기 방석, 고아한 패턴의 벽지 조명, 볕가리개는 모두 장응복. 자동 공작 기계(CNC)로 장석이 들어가는 곳마다 은박을 씌우고 끼워 완성한 장석장, 화이트 오크를 탄화해 나무의 색감에 깊이를 더한 원형 소반은 모두 하지훈.



1 차양의 기능을 겸하되 안팎을 차단하지 않고 자연스레 공간을 분리해 한층 유연한 쓰임의 국화 문양 볕가리개는 장응복.
2 현대적으로 해석한 나주반은 하지훈. 정교한 디테일이 수공예적 미감을 배가해준다.
3 사랑채 한쪽에 자리한 금박 장식의 유리 테이블은 우리네 일주반을 새롭게 바라본 작품으로 하지훈.




속 깊은 고택의 환대
<차경(借景), 운경고택을 즐기다>는 서울식 전통 한옥인 운경고택이 첫 번째로 주관한 전시다. 운경고택은 국회의장을 지낸 운경(雲耕) 이재형 선생이 생전에 머물던 장소로 조선 14대 왕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이 살던 도정궁 터에 세운 한옥이다. 운경은 여기서 1953년부터 1992년까지 머물렀다. 공간은 행랑채와 사랑채, 안채로 이루어져 있으며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연못을 품은 내정이 자리한다. 전시는 이렇듯 삶의 흔적이 스민 공간에 장응복, 하지훈의 공예 작품을 담아 우리네 삶 속에 함께 살아 있는 집의 본질을 되묻는다. 전통적 미감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며 남다른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두 사람의 다양한 공예품은 공간의 일부인 양, 자연스러운 풍경을 빚어낸다. 모난 마음을 다독이는 감상의 즐거움은 물론 전통적 디자인에 현대적 쓰임새까지 갖춘 공예 작품의 진수를 경험하게 해준다.



1 정갈한 다이닝 룸을 떠올리게 하는 안채. 순백의 담백한 색감이 돋보이는 정면의 소슬모란지장, 가운데 음영반과 지반은 모두 장응복. 원형 소반, 의자 등받이처럼 좌식 생활에서도 편히 기댈 수 있도록 디자인한 삼각침은 하지훈.
2 고유한 패턴을 한지에 디지털 프린트해 제작한 지우산은 장응복.



군더더기 없이 최소의 것만 더해 공간 그리고 자연 자체를 하나의 ‘무늬’처럼 연출한 안채. 몬드리안의 그것처럼 다양한 조각 천을 이어 붙인 조각보는 장응복.


뒷마당에는 오붓하게 차 한잔을 즐길 수 있도록 작은 다실을 마련했다.



1, 2 호랑이 다리에서 모티프를 얻은 투명한 아크릴 호족반, 장응복의 패브릭으로 변주를 준 삼각침은 하지훈.
3 은은하게 비치는 투명도가 매력적인 오르간디 소재의 눈꽃차이는 장응복.

Editor홍지은(글), 김소현(진행)

Photographer이종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