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에서 영원으로 하우징 January, 2019 아름다운 선인장 곁에서 올리브가 여문다. 아드리아해와 이오니아해가 만나는 곳, 지중해 최고의 휴양지로 손꼽히는 이탈리아 남부 풀리아에서 오롯이 ‘나’를 발견한다. 건축가 루도비카와 로베르토 팔롬바 부부의 공간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자꾸만 겨울잠을 자고 싶었다.

하얀 벽에 둘러싸여 오래된 성을 닮은 집. 이곳이 지난 30년간 주인 없이 방치되었던 기름 방앗간이었다는 것을 과연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450m²에 달하는 웅장한 규모와 6m에 이르는 아치형 층고, 오래되어 색이 바랜 벽돌 기둥에서 어렴풋하게나마 지난 400여 년의 역사를 짐작해볼 뿐. “처음 이곳은 온통 새카맸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더는 못 참겠다고 말했던 것 같아요. 빛을 원했던 거지요.”

세계적인 건축가이자 디자이너 부부 루도비카와 로베르토 팔롬바의 풀리아 별장은 한 줄기 빛을 찾는데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왼쪽의 벽을 튼 덕에 시시각각 들어오는 빛의 향연이 아름다운 풍경을 빚어낸다. 소파는 팔롬바 부부가 디자인한 알토피아노, 앞쪽의 짚으로 만든 라마 라운지 체어는 모두 자노타.



지친 일상을 다독이는 위로의 공간
인테리어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이라면 그들의 이름을 한 번쯤 들어보았음 직하다. 1994년 함께 Ps+a(Palomba Serafini Associati)를 설립한 둘은 지금까지 건축, 인테리어, 디자인뿐만 아니라 그래픽 디자인, 아트 디렉션, 마케팅, 미디어 전략 컨설팅까지 전방위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탈리아 산업디자인협회의 황금 나침반, 엘르 데커레이션, 디자인 플러스, 레드 닷 등 각종 디자인 어워드에서 수상한 것만 해도 여럿. 사실 둘의 이름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굴지의 브랜드에서 더 자주 만날 수 있다. 보피, 폴트로나 프라우, 엑스타라를 비롯해 포스카리니, 드리아데, 카르텔, 엘마, 키친 에이드, 카펠리니, 자노타, 주케티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호흡을 이어오고 있는 브랜드를 모두 나열하기도 어렵다. 2018년 11월 상하이에서 개최된 살롱 델 모빌레(Salone del Mobile)에서 둘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3인의 건축가 중 한 팀으로 선정되어 기능성과 혁신, 지속 가능성에 관한 마스터 클래스를 진행하기도 했는데, 풀리아 별장이야말로 그들의 철학을 담아낸 잘 빚은 그릇에 다름 아니다.

별장은 도면을 만들고 시공을 마치는 데까지 다섯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450m²실 내 공간은 물론 안뜰과 테라스를 아우르는 300m²규 모를 생각하면 말도 안 되게 짧은 기간이다. 모든 자재와 인력을 1km 반경 이내에서 공수하는 이탈리아 전통 시공 방식인 ‘0km’를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공간에 남아 있던 흔적과 역사를 지켜내면서 주거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변화에 주력한 까닭이다. 실내는 물론 외부까지 이탈리아 남부 전통 방식 그대로 회벽으로 마감했다. 물론 구조를 살짝 바꾼 것도 있다. 가장 절실했던 빛을 들이기 위해 안뜰과 거실 사이를 가로막은 벽을 트고 유리문을 다니 따뜻한 지중해 햇살이 종일 쏟아졌다. 화사한 회벽 덕에 달리 많은 인공 조명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창문 하나도 밖으로 내지 않은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3일 전에 만난 사람도 기억하지 못할 만큼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여유를 찾을 공간이 절실했어요. 일상에 지친 우리가 오롯이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곳이기를 바란 거지요.”

골조는 살리고 최소한 장식만 더한 리노베이션은 사실 ‘복원’의 과정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1600년에 지어진 방앗간에 먼지가 켜켜이 앉아 있던 거무튀튀한 벽을 걷어내고 흰 회색으로 마감하니 벽돌의 질감이 그대로 드러났다. 따스한 볕이 오래도록 스미는 흰벽은 지중해 남부에서는 청결함을 상징하는데, 석회가 예로부터 습도 조절 및 방수는 물론 박테리아 박멸에도 도움을 주는 천연 재료이기 때문. 자칫 밋밋할 수 있는 집 안 곳곳에는 자신들이 디자인한 가구를 놓았다. 개중 가장 아이코닉한 라마 라운지 체어는 가죽 소재의 기성품과 달리 짚으로 만들었는데 로베르토의 쉰 살 생일을 맞아 특별히 자노타로부터 선물 받은 것이라고.

“이 의자는 루도비카를 위해 디자인했어요. 그녀가 책 읽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 큰 스트레스예요. 5분에 한 번씩 자세를 바꾸거든요(웃음).”

습기 때문에 조금씩 낡기 시작한 의자는 현지에서 다시 복원할 계획이다. 부부는 디자인을 의뢰받으면 늘 꼭 필요한가, 현재 디자인을 향상할 수 있는가를 자문한다고. 로베르토는 “아니라면 응당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점을 다음 세대에게 가르쳐야 하고요”라고 역설한다. 스타일은 결코 형태를 정의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젓는 그들은 스스로를 스타일리스트로 말하기보다 ‘사람’을 위해 생각하고 고민하는 철학가, 자신만의 언어인 ‘건축’으로 그것을 풀어내는 이들이라 말한다.

1 로베르토의 고조할아버지가 소장하고 있던 오래된 옷장은 사르데냐 출신인 그의 뿌리를 상기해주는 몇 안 되는 물건 중 하나. 독특한 촛대 역시 세라미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한 로베르토의 삼촌이 부활절을 기념해 만들었다.
2 부부가 디자인한 테이블과 의자로 꾸민 다이닝 룸. 테이블은 엑스테타, 의자는 드리아데, 램프는 플로스 제품.


별 모양의 독특한 아치형 천장 구조(Stella a Volta)는 이탈리아 남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전통 건축양식이다. 부부는 이 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이 ‘천장’을 꼽기도 했다.



사람이 먼저인 건축
그들은 같이 살고 함께 일한다. 루도비카는 “창의적인 두 사람의 만남만 한 재앙은 없다. 균형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정신적 독립성을 갖고 근본적인 포인트를 찾는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사실 두 사람은 라이프스타일도 다르다. 루도비카는 일이 없는 토요일에는 늦잠을 자고 정오 즈음 기상해 달리기를 한 후 전시를 보거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반면 로베르토는 아침 일찍 일어나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거나 글을 쓰고 저녁 이른 시간이면 기절하듯 잠들어버린다. 물론 주중에 짬이 나면 함께 춤을 추러 가는 일도 놓치는 법이 없다.

“함께 한 첫 프로젝트가 테이블 디자인이었어요. 디자인 가닥을 잡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루도비카가 벙어리처럼 사흘째 말이 없었지요. 답답해서 따져 물었더니 ‘이 테이블을 제작하면 수없이 많은 나무가 잘려나갈 것 아니냐’며 울먹거리는 것 아니겠어요? 나는 그때 우리가 아주 다르지만 같은 철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답니다.”



1 대리석으로 욕조를 만들고, 최소한의 것들로만 꾸민 욕실. 침실과 욕실 사이에 높이가 낮은 벽을 설치해 공간을 나누되 창문으로 욕실까지 자연광이 들어오도록 해 몽환적인 분위기를 빚어낸다. 샤워기 및 수전은 주케티.
2 나무 침대는 로베르토 증조할아버지의 것으로, 원래 장남만 대대로 물려받아 결혼 전까지 사용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처음으로 이를 깨고 로베르토의 외동딸이 받아 쾌재를 불렀다고.
3 스텔라 아치형의 천장 구조를 그대로 노출하면서 거울로 제작한 옷장을 설치해 공간을 더욱 넓어 보이게 연출했다. 덕분에 분리한 듯 연결한 유기적 공간이 완성되었다.
4 라이프스타일은 다르지만 가치관만큼은 꼭 닮은 두 사람.



잘 정제된 진심
쌍둥이처럼 똑같은 그들의 가치관은 공간 구석구석에서도 잘 드러난다. 두 사람은 밤이 되면 오직 하얀 초, 그리고 부부가 디자인하고 현지 장인에게 의뢰해 제작한 주철 조명, 벽난로의 불빛만으로 실내를 밝힌다. 가장 좋아하는 공간을 묻자 계절에 따라 혹은 함께하는 이에 따라 다르다며, 그래도 하나를 꼽자면 벽난로라고 말한다. 로베르토는 바닥에 불을 피우고 둘러앉으면 마치 선사시대로 돌아간듯 공간성이 점차 희미해지고 내면에 침전하는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고. 둘은 벽난로와 같이 기발한 아이디어에서부터 커다란 건축 프로젝트까지 대화를 거치지 않는 주제가 없다. 스튜디오를 설립하고 함께 일한 지 어느덧 25년. 최근에 풀리아 남부 대저택 팔라초 다니엘레(Palazzo Daniele) 리모델링을 끝낸 부부는 2019년 카르텔, 라우펜과 같은 세계 유수 디자인 회사와 52개 프로젝트 완성을 목표로 삼고 있다. 영감의 원천이 어디냐는 질문에 가장 먼저 ‘사람’을 꼽는 두 사람.

“소비 지향주의가 생태계를 파괴하고 괴기스러운 욕망을 낳았습니다. 과거 전쟁이 있었다면 현대에는 이웃이 새로 자동차를 장만했다는 등의 불필요한 정보가 유발하는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있어요. 따뜻한 휴머니즘이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은 이유가 여기 있지요. 우리의 건축은 단순하고 정직해요. 하지만 브랑쿠시도 말하지 않았나요. ‘간단하다는 것은 고로 복잡성이 해결되었다는 것’이라고.”

그들의 공간에서 긴 겨울잠을 청하고 싶어지는 것은 비단 나만일까. 자연에 순응해 사람이라는 가치에 마음을 기울이는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깨고 싶지 않은 꿈을 꾸는 기분이다.

1 테라스에 자리한 독채는 주방과 욕실, 침실로 구성되어 있다. 따스한 볕이 머물어 동화같은 분위기를 완성했다.
2 풀리아 지방의 작은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테라스. 층층이 연결된 테라스는 한 계단씩 오르면 전경이 조금씩 바뀌는 것이 매력적이다.
3 이 집에서는 언제든 혼자가 될 수 있다. 색색의 미니 테이블은 에스테타.


안뜰에는 일부러 조명을 설치하지 않았다. 큰 선인장과 부부가 디자인한 라운지 소파, 테이블이 전부. 선 자체가 아름다워 별다른 장식도 필요 없다. 소파와 테이블은 드리아데.

Editor홍지은

Photographer김민은(파리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