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로 물든 아르데코 하우스 하우징 March, 2020 프랑스 낭만주의 여성 작가 조르주 상드(George Sand)는 자주 남장을 하고 시가를 피웠지만 사랑 앞에서는 한없이 나긋한 여자가 되곤 했다. 디자이너 바네사 코키아로의 핑크빛 공간 역시 그녀처럼 기분 좋은 역설을 보여준다. 여성스럽되 쉬이 바스라지지 않는 단단한 조약돌처럼 깊은 아름다움이 곳곳에서 배어 나온다.

봉숭앗빛 공간
디자이너 바네사 코키아로의 집을 한 가지 컬러로 표현한다면 단연 어린 소녀의 발그레한 복숭앗빛 , 해 질 녘 희미하게 그러데이션되는 석양의 핑크색일 거다. 신기한 점은 석고를 걷어낸 후 별다른 마감도 하지 않은 투박한 무채색 벽이 핑크와 그럴싸하게 어우러진다는 것. 마치 리허설 없이도 합이 잘 맞는 재즈 앙상블의 즉흥 연주를 닮았달까. 하지만 순간의 감정이나 기분에 따른 선택이나 우연은 아니다. 분홍색 벽과 모서리를 둥글린 소파, 낮은 커피 테이블 때문에 자칫 지나치게 여성스러운 공간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바네사에게 절친한 친구이자 건축가인 디에고 델가도 엘리아스는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페인트를 걷어낸 벽을 마감하지 않고 노출된 채 그대로 두는 것은 어떻겠냐는 것. 페루 출신으로 미국 마이애미 아르키텍토니카(Arquitectonica) 에이전시를 거쳐 파리에 정착한 그는 엄격한 파리시 고건물 관련 건축 규정과 제한을 준수하면서도 바네사의 세심한 요구를 존중해야 하는 꽤나 복잡한 리모델링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했다. 건물의 하중을 지탱하는 내력벽 구조로 이뤄진 바네사의 공간은 구조적으로 큰 변화를 꾀하기 어려웠기에 먼저 거실을 둘로 나누던 중앙 벽을 허무는 것부터 시작했다. 이렇게 큰 거실을 만들고 천장은 화려한 몰딩이 돋보이는 화이트 마감으로 검박한 벽과 대조를 이루도록 했다. 출입구에서 복도를 중심으로 오른쪽은 그녀의 침실, 욕실, 사무실을 차례로 마련했고 왼편에는 주방과 화장실을 두었다. 주방은 요리를 좋아하는 바네사가 가장 애착을 갖는 공간으로 창이 안뜰로 향해 있어 조도가 낮은 점을 역으로 활용해 짙은 톤의 핑크색과 붉은 대리석으로 마감했다. 여기에 빈티지 조명을 달아 어둡지만 무겁지 않고 되레 따뜻한 공간이 완성되었다.


정면의 거울은 1970년대 이탈리아 빈티지 제품으로 곁에 놓은 식물과 어우러져 한 폭의 작품 같은 느낌을 준다. 주방의 대리석 컬러가 이채로운데 뒤편에 보이는 벽난로의 와인색에서 영감을 받아 톤 온 톤으로 매치했다. 유니크한 테이블은 건축가 디에고 델가도 엘리아스(Diego Delgado Elias)가 직접 디자인했다.


바네사가 앉아 있는 의자는 닐스 뮐러(Niels Møller)가 디자인한 것으로 메종 피에르 프레이(Maison Pierre Frey)를 통해 패브릭을 교체했다.



소파와 러그는 디에고가 직접 디자인하고 메종 피에르 프레이에서 제작했다. 조명은 아르데코 시절의 빈티지 제품으로 천장 조명을 벽부등으로 리디자인했다.



톤 온 톤 컬러와 소재의 믹스 매치
호주 애들레이드 출신의 바네사는 2008년부터 하퍼스 바자 오스트레일리아를 시작으로 네타포르테(Net-A-Porter)와 미스터 포르테(Mr. Porter)를 거느린 육스(Yoox) 그룹과 유명 에이전시 2DM 소속 패션 스타일리스트로 일하다 돌연 2010년 밀라노행을 택했다. 이탈리아를 거쳐 파리에 정착한 바네사는 현재 브라이드즈메이드를 위한 드레스, 점프슈트 등을 디자인하는 개인 브랜드 ‘바네사 코키아’를 운영하고 있는데, 파리 그리고 지금의 아파트는 영감의 창구이자 안식처인 셈이다. 줄곧 마레 지구 쪽에 살던 그녀는 2017년 말 즈음 파리 북쪽 우르크 운하와 뷔트 쇼몽 공원 사이에 자리한 이 아파트로 거처를 옮겼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 때문에 고민했지만 공원까지 2분 거리인 데다, 큰길가의 모서리 공간에 맞춰 설계된 건물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건물 좌측과 정면의 창으로 계절과 무관하게 해가 자주 드는 것이 무엇보다 좋았고요.”
하지만 공간을 온전히 ‘누리는’ 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80m² 공간의 리모델링은 공사뿐 아니라 디에고가 가구를 손수 디자인하고 제작까지 해 8개월 넘게 이어졌다. 지난해가 되어서야 비로소 입주할 수 있었던 배경. 오랜 고민 덕분일까, 공간은 부드러우면서도 독창적인 오라를 지니게 되었다. 여성스럽게 표현된 공간과 대비되는 묵직한 오브제와 소품으로 리듬감을 더했는데 볼드한 유리, 브라스 소재의 조명은 모두 두 사람이 직접 상투앙 벼룩시장에서 발품을 팔아 구입했다. 개중 1920년대 제작된 아르데코 스타일 조명은 특유의 장식성과 기하학적 조형미로 거실 한가운데 자리한 벨벳 소재의 소파와 조화롭게 어우러져 특유의 미감을 완성했다.
“언뜻 아트피스처럼 보이는 거실의 스콘 조명은 디에고가 발견한 중고 사이트 광고를 보고 방문한 어느 프랑스 노부부 수집가의 집에서 찾아냈어요. 원래 큰 샹들리에였는데 디에고의 손에서 스콘 조명으로 탈바꿈했죠(웃음).”


1 공간마다 다양한 형태와 색감으로 표현한 대리석 벽난로. 의자는 칼 야콥센이 디자인했다.
2 복도에서 거실로 이어지는 두 입구. 내력벽이라는 한계 때문에 허물어서 하나의 통로로 만들 수밖에 없었는데 되레 보는 시점에 따라 다른 인상을 주는 매력적인 공간이 탄생했다. 연결된 듯 다른 두 개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느낌 때문에 바네사는 더 만족스럽다고.
3 빈티지하면서도 아늑한 느낌의 바네사의 방. 리모델링하면서 유일하게 바꾸지 않고 그대로 둔 빈티지 거울이 눈에 띈다. 케인으로 짠 드레싱은 디에고가 손수 디자인과 제작을 맡았다.


작은 사이드 테이블은 빈티지, 벽에는 플라멩코 댄서인 바네사의 친언니가 공연한 모습을 걸어 갤러리처럼 연출했다.



히로인에게 바치는 레이블
프리랜서 스타일리스트로 약 4년의 시간을 보낸 이탈리아는 처음부터 끝까지 결코 쉽지 않은 곳이었다.
“호주인이지만 이탈리아 2세였던 부모님 밑에서 자랐으니 당연히 문화적인 장벽도 쉽게 넘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좀처럼 여성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이탈리아 패션계의 보수성에 적잖이 충격을 받기도 했지요.”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늘 있었지만 정작 실현된 곳은 밀라노가 아닌 파리였다. 친한 친구로부터 들러리로 서줄 것을 부탁받은 후 드레스가 아닌 슈트를 제안했고, 이 작은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자신만의 브랜드를 론칭할 수 있었다.
“사실 제가 웨딩 비즈니스에 몸을 담고 있다는 것이 가끔 놀라워요. 결혼을 그렇게 꿈꿔본 적이 없거든요(웃음).”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점이 그녀의 디자인을 더 특별하게 만든다. 여성의 몸이 지닌 실루엣과 선을 능숙하게 표현하면서도 실용성을 놓치지 않는 바네사의 신부복 디자인은 여느 브랜드와 달리 개성 넘친다. 계속해서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어내는 데 집중하기보다 기존 컬렉션을 활용해 다양한 색이나 소재로 변화를 주는 점도 이채롭다. 무엇보다 컬렉션마다 여성 노벨상 수상자, 기자, 정치 운동가 등에게 영감받아 그들의 이름을 붙인 것도 흥미롭다. 세상을 바라보는 그녀의 남다른 시선이 대번에 읽히는 대목이다. 급진파 여성 참정권론자 에멀라인 팽크허스트, 시민권 운동가 로자 파크스, 시몬 드 보부아르와 같은 철학가와 정치 운동가는 그녀에게 있어 진정한 히로인이라고. 몸을 구속하는 뻔한 드레스가 아닌 자신의 정체성에 더 집중하고 나아가 메시지를 담은 그녀의 컬렉션은 고스란히 공간에도 연결되는 모습이다. 여성스럽고 나긋한 성품을 담되, 강하고 단단한 내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일견 부드럽지만 요소요소에 남다른 소재를 더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하는 건 패션은 물론 자신의 아지트에도 한결같다.




1 주방 한쪽에 마련한 휴식 공간. 의자는 닐스 뮐러가 디자인한 제품으로 메종 피에르 프레이를 통해 패브릭을 교체해 공간과의 균형을 꾀했다. 램프는 빈티지.
2 요리를 좋아하는 바네사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주방. 그녀의 이탈리아인 뿌리를 보여주는 모카 포트가 눈에 들어온다.
3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작은 타일로 이뤄진 모로칸 배스(Moroccan Bath)에 영감을 받아 만든 욕실. 거울은 빈티지 제품이다.
4 화장실은 담백하고 소박하게 표현했다. 큰 거울 대신 여러 모양의 빈티지 거울로 공간을 꾸몄다.

Editor홍지은

Photographer김민은(파리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