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셈여림표를 따라서 거실 May, 2020 금속 차양의 푸른색이 묵직한 음을 퉁긴다. 여기에 따뜻한 색감의 1970년대 빈티지 가구를 가볍게 얹었더니 경쾌하고 밝은 음율이 탄생한다. 파리의 인테리어 디자이너 자크 에르부에의 공간은 오선지 속 높은음자리표과 음계, 박자로 완성한 완벽한 삼중주를 떠올리게 한다.

포르티시모, 잘 조율한 피아노처럼
에르부에 부부는1990년대 후반 즈음, 120m²의 오스마니안 스타일의 아파트를 매입했다. 부르주아 보엠(Bourgeois Boheme)을 뜻하는 젊고 자유분방한 무리가 몽마르트르로 몰려들기 한참 전이니 벌써 20년도 더 된 일이다. 파리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갤러리의 대표이자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활약하고 있는 그는 공간을 하나의 갤러리처럼 꾸미는 데 집중했다. 거실에는 장 로피에르, 피에르 폴랑처럼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디자이너의 가구는 물론 자신만의 안목으로 선별한 빈티지 가구를 들여 날실과 씨실처럼 촘촘한 조화를 이룬다. 조용한 듯 기품 있게 때로는 리드미컬한 울림으로 자신의 집을 완성한 그는 디자이너라기보다 음악가처럼 인테리어를 다루는데 그에게 인테리어란 각각의 음표와 빠르고 느림의 박자 그리고 화성으로 빚어내는 피아노 연주와 비견되는 일이라고. 사실 피아니스트를 꿈꾸었던 그는 놀랍게도 단 한 번도 디자인을 공부해본 적이 없다.
“다섯 살부터 피아노를 시작했지요.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부모님의 말씀을 따라 전문 통역사가 되려고 그만두었지만 아마도 그 오랜 역사가 삶에 깊이 녹아들어 있는 것 같아요. 통역가로서 회의가 들던차, 포토그래퍼 장 폴 구드나 사치 갤러리의 창립자인 찰스 사치와 같은 이들을 만나며 홍보 전략 일을 오랫동안 하기도 했지요.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친누나와 함께 시작한 앤티크 갤러리가 오늘까지 이어지게 되었답니다.”
음악에서 언어로, 다시 경계를 넘나드는 예술 애호로. 어쩌면 예상을 뒤엎는 비상한 감각과 색감으로 가득 찬 인테리어는 그의 독특한 이력에서 비롯했다고 해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1960~1970년대 프랑스 디자이너의 가구로 채운 거실. 풍성한 색감과 볼륨의 가구에 포르나세티의 그림이나 촛대, 청동 조각 정도의 장식만 들여 간소하게 연출했다. 소파와 테이블은 장 로이에르(Jean Roy?re)가 디자인했으며, 핑크색 푸프는 1950년대 프랑스 빈티지 제품, 플라크(Flaque) 카펫은 자크 에르부에가 직접 디자인한 것이다.


1, 2 거실에는 그가 가장 사랑하는 오브제 피아노를 놓고 ‘뮤직룸’이라 이름 붙였다. 다양한 인테리어를 시도하는 랩(Lab)의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음악을 연주하는 치유의 공간이기도 하다. 팔걸이 의자는 피에르 폴랑의 리틀 튤립.
3 다양한 이력을 지닌 자크 에르부에는 온화하면서도 비지니스맨의 시크하고 차가운 인상을 동시에 풍긴다.


자크 에르부에는 인테리어뿐 아니라 조명, 카펫 등의 디자인에까지 직접 참여하며 전방위로 활동하고 있다. 뒤편에 보이는 조명은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행성에서 영감을 받아 손수 제작한 제품이며 파우더 핑크색의 푸프는 1970년대 빈티지 가구이고, 촛대는 세르지 만소가 디자인했다. 벽난로 위 그림은 포르나세티.



냉정과 열정 사이
족히 2m가 넘는 복도는 푸른색으로 마감해 바닷속처럼 몽환적인 느낌을 배가했다. 복도를 중심으로 오전 내내 햇살이 드는 한쪽 공간은 거실과 주방으로, 중정으로 향하는 반대편은 부부의 침실로 만들었다.
“보통 이러한 아파트는 복도를 중심으로 공간 구조를 거실과 마스터 베드 룸으로 나누는데 저는 베드 룸을 주방으로 바꾸는 작업부터 시작했어요. 우리 가족의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재정비한 거죠.”
주방에 들어서면 단번에 눈을 사로잡는 푸른색 금속 조형물은 그가 특별히 고안해 디자인한 작품. 건물 외부 차양으로 쓰이던 것을 실내에 설치해 공간을 분절하면서도 열린 공간으로 실현해 신선한 청량감을 선사한다. 그는 자칫 차갑고 위압적일 수도 있는 조형물에 손수 자단목과 황동으로 디자인한 벽장식을 더해 차가우면서도 따뜻하고 묵직하면서도 리듬감 있는 분위기를 완성했다. 공간을 나누되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싶었던 고민이 읽히는 곳은 비단 주방뿐 아니다. 일례로 서재였던 곳을 침실로 리모델링하는 작업은 천장과 벽이 연결되는 이음 돌출 장식 때문에 꽤나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이었다고.
“보시는 것처럼 민트색 상자를 그대로 방으로 들여 ‘상자 안의 상자’로 구성했어요. 붙박이장의 장식을 천장까지 끌어올려 층고를 높아 보이게 만들면서 천장 구조를 일부러 노출했고요. 때로는 이처럼 ‘빈 공간’을 보여줄 필요도 있다고 생각해요.”


찰흙으로 빚은 듯한 자크 자리주(Jacques Jarrige)의 1990년대 식탁과 에르부에가 직접 공수해온 1950년대 빈티지 의자가 캐러멜 컬러의 카펫과 화음을 맞추듯 그럴싸하게 어울린다. 뒤편의 콘솔은 이탈리아에서 가져온 빈티지 제품이며 거울, 촛대는 모두 자크 에르부에가 디자인했다.


1 해가 들지 않는 어두운 복도를 부러 짙은 푸른색의 페인트로 마감해 햇빛이 들면 더욱 환하고 입체적으로 보이는 착시 효과를 빚어낸다. 테니스 공 모양의 푸프는 1970년대 스레자이(Srezai) 디자인, 금속 소재의 벽 조명은 1970년대 빈티지 제품, 정면에 보이는 그림은 젊은 프랑스 작가 막시밀리앵 펠레의 작품이다.
2 기다란 차양, 라디에이터를 가리는 긴 거울은 그의 인테리어에서 1 수직성을 표현하는 주요한 요소로 쓰인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부부의 침실은 일부러 힘을 빼고 민트 톤 페인트로 차분하게 마감했다. 여기에 톰슨(Thompson)의 유화와 기욤 멧 드 페닝엔(Penninghen)의 조각을 과하지 않게 들여 지루하지 않게 표현했다.
“어떤 공간에서는 브람스나 멘델스존이 떠오르지 않으세요? 저는 ‘색’과 ‘음’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요. 저음이나 반음은 어두운 색을 떠올리게 하는 반면 초록색과 같이 싱그러운 컬러를 보면 생동감을 주는 음계가 떠오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그는 베토벤, 브람스, 쇼팽과 같은 낭만주의 클래식을 연주해오다 최근 즉흥곡 연주를 위해 다시 재즈를 배우기 시작했다. 악보대로 따라가는 연주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곡을 창작하고 싶다는 그의 고백은 어쩐지 단순히 인테리어 영역에 그치지 않고 디자이너로서 자신만의 길을 다양하게 개척하고 있는 행보와도 닮았다. 프랑스 시인 랭보는 각 음에 맞는 색감, 그리고 그에 맞는 음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들 간에 일어나는 공감각적 현상을 삶 속에서 자주 관찰할 수 있다고도 덧붙인 바 있다. 자크 에르부에가 다양한 색과 오브제로 풀어낸 공간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선과 면 그리고 색의 리드미컬한 조화로 빚어낸 자신의 아파트야말로 그가 그토록 염원하는 첫 번째 재즈 즉흥곡이라 불러도 손색없지 않을까.


1 중정과 접한 부부의 조용한 침실에는 낮의 해가 깊숙이까지 들어온다. 빈티지 콘솔 위의 작품은 톰슨이 1978년 작업한 작품 ‘아틀리에’, 위에 나란히 놓은 조각은 페닝엔의 1950년대 작품이다. 콘솔 양쪽에 놓은 테이블 램프 역시 1950년대 제품으로 자크 앤 내니 루엘랑(Jacques & Dani Ruelland)이 디자인했다.
2 지그재그 손잡이가 유니크한 붙박이장은 자크 에르부에가 디자인한 것으로 일부러 욕실 천장 너머까지 끌어올렸다. 공간의 수직성을 강조해 층고가 높아 보이는 착시 효과를 노리면서도 천장의 장식을 자연스레 보여주기 위한 방법이었다고. 붉은색 의자는 피에르 귀아리쉬(Pierre Guariche)가 1950년대에 디자인했다.
3 단순하고 덤덤하게 꾸며 아늑한 분위기를 돋우는 부부의 욕실. 유려한 곡선의 조명은 자크 에르부에 디자인.


침실을 들어설 때 보이는 맞은편 거울과 장식 역시 자크 에르부에가 직접 디자인했다. 공간을 넓어 보이게 하면서도 예상할 수 없는 왜곡을 주는 것이 매력적이다.

Editor홍지은

Photographer김민은(파리 통신원)